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하킴 (문단 편집) == 치세 == [[파일:알 하킴 모스크.jpg|width=600]] 부왕 알 아지즈 대에 시작되어 1010년에 완공된 알 하킴 모스크. 그의 명령으로 미나렛은 모퉁이에 위치하게 되었다. 998년 수백명에 달하는 다마스쿠스의 반파티마 계열 지도자들이 총독 관저의 하맘 (목욕탕)에 초청되었다. 그들은 파티마 조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응하지 않으면 처벌이 있을까 두려웠고 설마 목욕탕에서 큰 일이 벌어질까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.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베르베르 병사들 (마그리비야)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말았다. 이 사건은 시리아 전체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. 다만 당시 알 하킴은 13세에 불과하였기에 이 학살은 섭정 바르자완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높다. 또한 잠재적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역사상 드문 일은 아니었다. 한편 같은 해 시리아의 아파메아 전투에서 파티마 군대는 동로마의 안티오크 총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. 이에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남하하여 샤이자르를 점령하는 등 시리아를 두고 20년간 이어지던 양국의 대립이 심화되었다. 그러던 1000년 전횡을 일삼던 섭정 바르자완을 암살하고 군중 앞에 직접 나타나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알 하킴은 친정을 시작하였다. 그리고 1001년 알 하킴은 알레포의 [[함단 왕조]]의 복속을 대가로 바실리오스 2세와 휴전을 체결하며 외부 역시 안정시켰다. 다만 명목상 파티마 조의 속국이었지만 함단 왕조는 양측 모두에게 연공을 납부하였다. 1004년 알 하킴은 다르 알 히크마 (دار الحكمة) 혹은 다르 알 일름 (دار العلم)이라 불리는 이집트판 [[지혜의 집]]을 세워 문화 진흥에 나섰다. 그 도서관에는 각각 1만 8천권의 저서를 수용 가능한 40개의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. 그 외에 대기근이 닥치자 그는 적극적으로 구휼에 임하였고 1016년에는 마침내 알레포가 파티마 조의 직할령이 되었다. 알 하킴의 치세에 파티마 조는 영토적, 문화적 측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. 또한 그는 20년간 15명의 재상을 임명하는 등 (미래에 실현되는) 강력한 재상의 출현을 경계하였다. 하지만 성군의 모습 외에 알 하킴은 그에 못지 않은 폭군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